영화 '1923 간토대학살'은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거대한 자연재해, 공포 정치, 유언비어가 만든 군중심리, 그리고 오늘까지 이어진 침묵과 부정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글은 영화가 채택한 고증과 증언 방식, 줄거리 전개, 1923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작품을 정리해 본다.
고증: 숫자의 정치에서 얼굴의 정치로
영화의 미덕은 ‘고증’의 층위를 촘촘히 겹친 방식에 있다. 첫째는 문헌 고증이다. 내무성·경찰·군 문서, 국회 기록, 재판 자료, 지방행정 문건, 당시 신문과 잡지를 대조해 사건의 시계열과 범위를 복원한다. 감독은 특정 문구의 삭제·수정 흔적, 수치의 변천을 타임라인으로 그려 관객이 ‘숫자의 정치’를 눈으로 보게 만든다. 둘째는 지리·현장 고증이다. 지도좌표와 옛 주소 체계를 현대 지도로 변환해 학살 지점을 현재의 도로·주거지·공원과 매칭한다. 관객은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이 과거의 현장임을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셋째는 구술 증언이다. 생존자와 유가족, 일본인 목격자, 지역사 연구자, 언론인의 인터뷰가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증언은 기억의 편차·망각을 수반하지만, 감독은 상호 검증(interview triangulation)과 보조 사료(사진, 사망진단서, 장례부)를 겹쳐 ‘감정의 진실’이 ‘사실의 진실’과 만나는 지점을 찾아낸다. 넷째는 시각자료 고증이다. 사진·필름의 촬영 지점과 각도를 3D로 재구성하고, 당시 건축 양식과 도로망을 참조해 사진 속 ‘그 자리’를 현재 화면과 오버랩한다. 이 기법은 기억을 추상에서 구체로 끌어내리는 강력한 설득의 장치다.
영화는 동시에 ‘고증의 한계’도 정직하게 드러낸다. 자료의 소실·검열, 수치의 불일치, 피해 가족의 침묵 등으로 인해 ‘정확한 숫자’는 영원히 닿지 못할 수 있다. 감독은 그 공백을 서둘러 메우지 않고, 빈칸을 빈칸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왜 숫자 앞에서만 안심하려 하는가?” 이 물음은 증언의 윤리로 이어진다. 타인의 고통을 설명 가능한 데이터로만 환원하지 말 것, 이름과 얼굴을 불러낼 것, 반복을 막기 위한 현재의 실천을 연결할 것.
마지막으로, 영화가 세운 가장 중요한 원칙은 ‘추모의 언어’다. 내레이션은 과장과 선동을 피하고, 차분한 문장으로 기록의 서랍을 연다. 피해자들을 호명하는 장면, 이름이 새겨진 작은 비석을 비추는 롱테이크, 폐쇄된 문서보관소의 정적—이 모든 연출적 선택은 관객을 분노로만 몰아가거나 카타르시스로 배출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과 책임’을 오래 머무르게 한다. 그래서 '1923 간토대학살'의 고증과 증언은 사실 검증을 넘어 ‘윤리의 형식’이 된다. 보는 순간 우리는 관객에서 증인으로 이동한다.
줄거리: 재난 이후의 소문 그리고 지워진 이름들을 찾아서
영화는 1923년 9월 1일 정오, 일본 관동 일대를 강타한 대지진의 현장으로 문을 연다. 흔들리는 필름, 불길에 휩싸인 목조가옥, 무너진 하천교량과 도쿄 만을 뒤덮은 검은 연기—초반의 이미지는 ‘자연 재난’을 사실적으로 각인시키는 동시에, 이 재난이 곧 ‘사람이 만든 재난’으로 변질되는 서사의 전조가 된다. 곧이어 내레이션은 도시 전역으로 번진 유언비어를 소개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와 약탈을 주도한다”는 악성 소문. 카메라는 당시 신문 지면과 내무성 문서, 자경단 동원 지침을 교차 편집하며, 소문이 ‘자연 발생’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증폭되었다는 정황을 제시한다.
중반부의 초점은 ‘자경단’ 조직과 검문·폭력의 일상화다. 영화는 골목 어귀의 임시 검문소, 칼·죽창·몽둥이로 무장한 시민들을 재현 장면과 삽화로 보여주며, 지명 암송 같은 ‘언어 시험’으로 조선인을 골라내던 야만의 절차를 복기한다. 동시에, 일본인 중에도 유언비어에 저항하며 조선인 이웃을 숨겨준 사례들이 증언으로 등장한다. 피해·가해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공포와 책임, 용기의 결을 세밀하게 포착하려는 연출이다. 줄거리의 정점은 ‘학살의 지도’를 재구성하는 대목이다. 감독은 구전·신문·재판 기록·장례부·묘비명 등을 겹쳐 당시 도쿄·요코하마·지바·사이타마 일대의 살해 지점을 지도 위에 찍어 나간다. 관객은 점점 조밀해지는 붉은 핀을 보며, 사건이 ‘며칠간,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체계적 폭력’이었음을 체감한다. 이 과정에서 군·경에 의한 살해, 민간 자경단의 폭행, 중국인과 일본 지식인의 피해까지 확장된 표적이 겹쳐진다.
후반부는 ‘이후의 100년’을 다룬다. 아직 공식으로 집계되지 못한 희생자 수,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공식 사죄의 부재, 유가족이 남긴 흑백사진 한 장,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함께 세운 작은 위령비, 그리고 삭제와 왜곡의 흔적들을 통해 “기억하지 않는 사회는 같은 비극을 반복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엔딩 시퀀스에서 감독은 이름 없이 묻힌 묘역 위로 카메라를 낮게 깔고, 화면 가득 새겨지는 이름들을 천천히 보여준다. 영화는 그렇게 ‘익명의 타자’를 다시 ‘개별적 인간’으로 돌려놓는 일을 줄거리의 종착점으로 삼는다.
시대적 배경: 제국 일본의 전시 체제, 소수자 혐오
간토대지진 직전과 직후의 일본 사회는 제국주의와 전시 경제, 치안유지의 사고가 결합하여 강경한 통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미 식민지로 편입되어 강제 동원과 동화 정책의 압력 아래 있었고, 일본 본토로 유입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저임금·고위험 노동에 투입되며 주거·위생·치안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재난은 기존의 차별 구조를 시험대에 올렸고, 공포는 가장 약한 계층으로 향했다. 영화가 인용하는 학계 자료와 신문 지면은 당시 내무성·경찰이 유언비어 확산을 방치하고, 군중 폭력을 ‘자력 구호’로 묵인했음을 시사한다. 정치적 맥락에서 보면, 간토대학살은 단지 돌발적 폭주가 아니다. 근대 일본이 구축한 ‘치안 국가’ 모델은 비상사태에 강력한 통제와 정보 독점을 정당화했고, 검열과 선전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대신 ‘비국민’을 가려내는 기제로 작동했다. 조선인·중국인·좌익·노동운동가·지식인 등 ‘불온’으로 분류된 대상은 재난 국면에서 ‘안전을 위한 제거’라는 명분으로 표적화되었다. 영화는 이런 구조적 차별을 개인의 증오심 탓으로 환원하지 않고, 국가·언론·학계·지역권력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당시의 미디어 환경도 중요한 배경이다. 전신·신문·벽보·구전이 얽혀 정보가 빠르게 확산되던 시기, 검증되지 않은 소문은 ‘공적 사실’이 되어갔다. 우물 독극물 설, 폭탄 지령 설, 방화 조직설 등 오늘날 가짜뉴스로 부를 만한 이야기들이 유통되며, 언어·피부색·복장을 근거로 한 즉석 ‘식별법’이 생겼다. 영화는 당시 기사·전단·통문을 화면에 확대해 보여주고, 시청자가 직접 활자를 읽게 하며 ‘소문이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를 체감하게 한다. 또한 배경은 일본 사회 내부의 균열과 연대를 함께 담는다. 일부 경찰·지식인·종교인·활동가들은 조선인을 숨기거나 폭력을 말렸고, 사건 직후부터 진상 규명과 추모의 움직임을 시작했다. 다큐는 이들의 기록을 보여주며 ‘혐오의 시대에도 연대의 윤리’가 존재했음을 강조한다. 이는 오늘의 관객에게 “당신이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무엇을 했겠는가”라는 현재형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제국 일본은 국제 여론을 의식해 공식 문서에서 사건의 일부를 축소·은폐했다. 피해 통계의 편차, 사인(死因) 분류의 조정, 지방보고의 누락 등 데이터 정치의 문제를 영화는 지적한다. 곧, 간토대학살은 자연재난이 낳은 우발적 폭력이 아니라, 식민지·차별·검열·비상통치가 교차한 결과이며, 이 구조를 알고 보아야 비로소 ‘재발 방지’의 교훈이 나온다는 것이 작품이 주제다.
'1923 간토대학살'은 자연재해 이후의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고증과 증언은 숫자를 넘어 얼굴과 추모로 우리를 이끌며, 줄거리는 익명의 희생자를 다시 이름으로 돌려놓는 여정이다. 시대적 배경은 식민주의·차별·검열·비상통치가 교차한 구조를 드러낸다. 100년 만의 고발은 과거의 책임을 묻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오늘의 언어와 미디어, 정치와 교육이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기억의 실천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응답하는 순간, 우리는 이 이야기의 관객이 아니라 ‘증언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