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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해양 생물학의 발원지 / 자산어보 / 흑산도 / 정약전

by hwangsong 2025. 5. 2.

영화 자산어보는 조선 후기 학자 정약전과 흑산도 어부 창대가 함께 생물학 서적인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흑백영화로 표현된 이 작품은 단순한 전기영화를 넘어 조선 시대 과학과 인간,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전한다. 본 글에서는 자산어보가 조선 생물학에 끼친 영향, 흑산도라는 공간의 의미, 그리고 실존 인물 정약전에 대해 심도 있게 살펴본다.

영화 자산어보 포스터 이미지
영화 '자산어보' 이미지

자산어보가 남긴 생물학적 유산

영화 ‘자산어보’는 단순히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자연과학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해양 생물 백과사전으로, 그 안에는 당대 조선 사회가 자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록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조선 시대 자연과학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서양의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고, 과학 지식은 주로 경험과 관찰에 의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정약전은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 어부 창대와 함께 생물들을 채집하고 관찰하며 생김새와 습성, 생태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그가 남긴 자산어보에는 물고기, 조개류, 갑각류 등 다양한 해양 생물들이 등장하며 각 생물에 대한 명칭, 생태적 특징, 용도, 채취 시기 등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해양 생물들 중 특히 홍어, 농어, 전복, 문어, 복어 등 각각의 특징들은  정약전이 남긴 귀중한 산물이며 자산어보에는 약 300종의 해양 생물의 특징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자산어보의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유학자의 지식 기록이 아니라 실제 민중의 지혜와 실천이 융합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창대와 같은 어부들의 구술, 현장 지식, 생활 속 경험이 바탕이 되었기에 자산어보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당시 다른 문서들과는 차별화된 요소이며, 조선 시대 과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산어보는 해양 생물에 국한되지 않고 조선의 해안 문화, 어업 방식, 생태 환경까지도 포괄하는 기록이었다. 이는 단순한 생물 목록이 아니라 생태계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 최초의 종합 생물학 자료라 할 수 있다. 특히 정약전은 생물에 대한 설명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묻어난다. 현대 생물학자들이 자산어보를 연구할 때에도 그 기록의 정확성과 과학적 접근 방식에 놀라움을 표한다.

당시 기후와 생태 조건을 고려하면, 자산어보는 조선 후기 바다 생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생태 타임캡슐’로도 불린다. 수백 년 전의 생물 다양성과 환경 상태를 비교·분석하는 데 있어 귀중한 참고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결국 자산어보는 단순한 유배 중의 산물이 아니라, 조선 과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지식 유산이며, 현대 사회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는 생물학적 기록이다.

흑산도의 자연과 지식의 만남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집필하게 된 배경에는 흑산도라는 공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흑산도는 조선시대 유배지 중에서도 특히 외딴 섬으로, 본래 학자들에게는 고립과 단절의 공간으로 여겨졌지만 정약전에게는 새로운 세계의 만남이자 자연에 대한 깨달음의 공간이었다.

그는 흑산도의 풍부한 생태와 민중의 삶에 깊이 몰입함으로써, 기존의 학문적 틀을 벗어나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흑산도는 조류의 흐름이 복잡하고 수온의 변화도 크기 때문에 해양 생물 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지역이다. 조선 후기의 자연학자가 이 지역을 연구하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지리적 환경이 학문적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정약전은 흑산도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의 생물들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그 생물들의 특성과 생존 방식, 인간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자세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생물학적 관찰을 체계화하려는 연구자의 자세였다.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정약전과 창대의 채집 장면은 단순히 생물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함께하는 행위로 묘사된다. 특히 그들은 바닷물의 온도, 생물의 서식 위치, 계절 변화 등을 세밀히 기록했고,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방식이었다.

또한 정약전은 섬 주민들의 언어, 어휘, 생물에 대한 명칭까지 채록하여 기록에 포함시켰고, 이는 민속교육 가치까지 함께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의 생활을 단지 유배생활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흑산도를 ‘열린 교실’이자 ‘자연 연구소’로 삼았고, 주민들을 ‘지식의 동료’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그의 태도는 위계 없이 평등하게 지식을 나누고, 민중의 삶과 지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실학자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흑산도에서의 경험은 그가 평생 갈고닦아온 학문을 현실과 접목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자산어보였다. 결과적으로 흑산도는 단지 자산어보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조선 후기 자연과학의 탄생지이며, 지식과 경험, 관찰과 기록이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이 섬은 정약전에게 생물학적 탐구의 무대였을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공존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를 실천한 삶의 공간이기도 했다.

실학자 정약전의 집념

정약전은 조선 후기 실학 사상가로서, 기존의 형식과 권위를 넘어 실용적이고 현실에 기반한 학문을 추구했다.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도전과 발전의 연속이었으며, 그가 남긴 자산어보는 그러한 학문적 집념의 산물이다. 특히 그는 유배라는 억압된 상황에서도 지적 호기심과 탐구 의지를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학문의 기회로 삼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형으로, 남인 가문의 일원으로서 정치적 박해를 받아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를 단순히 정치적 추방의 장소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흑산도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오히려 지식을 축적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했으며, 그러한 시각이 자산어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는 그가 단지 이론가가 아니라, 현실에 뿌리를 둔 실천적 지식인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정약전은 철저히 민중과 함께했다. 특히 어부 창대는 그의 지식 파트너이자 동료였다. 창대는 당시 민중의 삶을 대표하는 인물로, 조선의 바다 생태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다. 정약전은 창대의 말을 경청했고, 그의 경험과 관찰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과정은 단순한 구술 정리가 아니라, 상호 존중과 공동 창작의 결과였으며, 이는 실학자 태도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자산어보는 단순한 생물 분류서가 아니다. 그것은 조선의 자연을 사랑하고 이해하고자 한 학자의 진심이 담긴 기록이며, 동시에 백성들과 함께 지식을 만들어나간 ‘공공의 책’이었다. 정약전은 학문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고, 그 이해는 개인의 명예나 관직이 아니라, 지식 자체의 힘과 사회적 가치에 기반했다.

정약전의 학문적 성취는 유교 사회에서 흔치 않은 ‘열린 사고’의 결과였다. 그는 서양의 분류 방식이나 체계화 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조선의 현실과 경험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이는 ‘중용과 실천’이라는 유학의 핵심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근대적 사고를 미리 보여준 것이다. 결국 자산어보는 정약전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실학자가 아니라, 실천적 지식인이자 기록자로서 조선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는 증거다. 그 집념과 태도는 오늘날 후대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영화 자산어보는 단순한 실화 재현이 아니라, 조선 시대 실학자의 탐구정신과 자연에 대한 존중을 담아낸 작품이다. 자산어보는 한국 생물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며, 오늘날에도 학문과 인간성의 균형에 대해 시사점을 준다. 정약전의 학문적 자세와 흑산도의 생태적 가치가 만난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