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늘에 계신(부제: 지충일기)’은 조선 후기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삶과 죽음을 다룹니다. 본 글에서는 조선 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충돌, 순교자의 신념, 그리고 영화의 고증과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봅니다.
유교와 천주교, 충돌의 시작
조선 후기의 사회는 유교적 가치가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던 시기였습니다. 양반 중심의 신분제와 유교 윤리가 사회 통치의 근간이었지만, 18세기 후반부터 '천주학'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천주학은 서학(西學)이라 불리며 서양에서 전래된 종교적, 철학적 사상으로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기본 사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러한 교리는 신분과 혈통에 기반한 조선 사회의 기본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주학은 단지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식인 계층은 물론, 남녀, 신분, 지역을 초월하여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조선 왕실은 이러한 흐름이 단순한 종교를 넘어 체제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효’를 부정하는 것은 곧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곧 무부무군(無父無君), 즉 아버지도 임금도 없다는 사악한 사상으로 여겨졌습니다.
1790년,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천주교인들에게 ‘조상 제사 금지령’을 전달합니다. 이는 곧 ‘효’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제사 거부’라는 명백한 이단 행위가 드러나자 조정은 이를 본격적인 박해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1년 후 윤지충과 권상연의 ‘진산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 왕조의 천주교 박해가 공식화됩니다.
이 사건은 단지 두 명의 개인이 처형된 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천주교가 제도를 위협한다는 공포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이후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로 이어지는 장기적 탄압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영화 ‘하늘에 계신(지충일기)’은 유교와 천주교의 역사적, 사상적 충돌의 기원을 그리고 있으며, 조선 후기 체제와 신념의 대립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지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신념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윤지충은 조선 후기 남인 가문 출신으로, 학문적 소양과 함께 실학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외사촌 정약용과 정약전, 정약종, 그리고 이승훈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천주학을 접하게 됩니다. 1787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북경에서 견진성사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이어갑니다.
윤지충은 구베아 주교의 ‘제사 거부’ 교령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179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전통적인 제사 절차를 생략하고 신주를 불살랐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주변 선비들과 가족, 친족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특히 신주를 불태웠다는 사실은 ‘패륜’으로 간주되었고, 이는 조정까지 알려지게 되며 공식적인 수사로 번지게 됩니다.
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종사촌이자 함께 천주교에 입교한 인물로, 윤지충과 동일한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습니다. 이들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거부했고, 재판을 받습니다. 윤지충은 “양반의 명예를 버릴지언정 천주께 죄는 짓고 싶지 않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평민은 단속하지 않으면서 왜 나는 벌을 받아야 하는가. 제사를 안 지낸 것이지 나라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지만 유교 중심 사회에서 이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당합니다. 당시 윤지충은 32세, 권상연은 40세였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로 기록되었고, 이후 신유박해로 이어지는 구조적 탄압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이후 윤지충의 일기와 생애는 많은 이들에게 신앙의 본보기로 회자되었고,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 되어 한국 천주교 124위 순교자 중 첫 번째 복자로 인정받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조선의 구조적 신념과 충돌한 개인의 신념의 상징이며,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닌 종교 자유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영화 <지충일기> 속 고증과 이야기
영화 지충일기는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서, 역사 고증을 바탕으로 당대 조선의 사회, 종교, 정치 상황을 입체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영화에서는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사악한 학문”으로 규정하고 박해를 정당화한 공식 문서 『사학징의』를 토대로 윤지충의 신주 불태움과 장례의 내용을 자세하게 묘사하여 관객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사학징의』 등 조선 정부의 공식 문서를 바탕으로 고문 장면과 심문 대사를 문답 형식을 재구성해 윤지충의 실제 발언이나 재판 기록을 반영했고, 고문의 종류(곤장, 국문, 참수)도 실제 절차에 맞게 순차적으로 보여줍니다. 윤지충이 “효와 충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장면은 유교 사회와 신앙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대목입니다.
또한 2021년 전북 완주 초남이성지에서 윤지충의 실제 유해가 발견되었는데, 목뼈 부분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자른 '예기 손상'이 있어 참수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고증 자료를 바탕으로 영화에서는 윤지충의 최후 장면을 재현하여 관객에게 침묵 속의 무게를 전달하며, 신념을 지킨 인간의 위엄을 오롯이 전달합니다.
‘하늘에 계신(지충일기)’은 단순한 천주교 박해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개인이 체제에 맞서 신념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는 오늘날 종교 자유, 양심의 자유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영화는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재 사회가 여전히 싸우고 있는 권위와 자유, 집단과 개인, 가치관의 대립에 질문을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