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나키스트’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실제 활동을 바탕으로 한 역사극이다. 192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들의 항일 투쟁은 단순한 액션을 넘어 이상과 현실, 신념과 혼란이 충돌했던 시대였다. 본 글에서는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줄거리, 그리고 역사적 고증을 중심으로 진실과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해 본다.
조선의 독립운동이 상하이로 향한 이유 – 시대적 배경
1920년대, 조선은 일본의 강압적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했고, 정치·경제·사회 전반에서 일제의 수탈과 억압이 극심해졌다. 이에 반발한 수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청년들은 자주독립을 외치며 각지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감시와 탄압이 심해, 이들은 자연스럽게 활동 거점을 해외로 옮기게 된다.
그중에서도 상하이는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거점 중 한 곳이었다. 당시 상하이는 '중국 속의 국제도시'였다. 1842년 난징조약 이후 개항한 상하이는 외국 조계(租界)가 존재하며, 중국 본토의 법률이 미치지 않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다양한 민족, 이념, 사상, 조직들이 얽히고설키며 활동하던 이곳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도피와 투쟁의 최전선이자 실험장이었다.
영화 '아나키스트'가 주목한 시기와 공간은 바로 이 상하이였다. 1920년대 중반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해 다양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이고 철학적이었던 집단이 바로 '조선 아나키스트 연맹' 또는 '의열단'과 연계된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3.1 운동 이후 국내의 대중 운동이 성장하자 아나키스트들은 조직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집에 모여 있던 이을규, 이정규 형제와 일본에서 온 백정기, 정화암 등이 모여서 조직화 방안을 논의하였고 그 결과 연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조선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 자체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다시 말해, 일제 타도는 수단일 뿐 무정부 이상의 사회 실현이 목적이었다. 이들의 사상은 단순한 정치적 독립운동이 아니라 철학적 투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폭력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직의 구조는 철저히 비밀스럽고 유동적이었으며, 암살, 파괴, 파업 선동, 자금 확보 등을 감행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상을 굽히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는 외로운 싸움이었고, 그들의 신념은 종종 배신, 내부 갈등,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흔들리기도 했다.
영화 ‘아나키스트’가 보여주는 모습은 단순한 항일 무장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사상적인 저항의 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권력과 억압에 맞서 싸우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꿈꿨다. 그 중심에는 상하이라는 국제도시가 있었고, 이곳에서 조선 아나키스트들은 세계 혁명의 흐름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영화 ‘아나키스트’의 줄거리 – 폭력 속에서 피어난 이상과 배신
영화 ‘아나키스트’는 2000년 개봉한 한국 영화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조선 아나키스트들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그려냈다. 줄거리는 192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로 구성된 조직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연이은 패배를 당한 일본은 간도에 거주 중인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 약 4,000명을 학살하였다.(간도참변) 이 사건으로 가족으로 잃은 조선인 소년 ‘상구’는 중국 상하이로 흘러들어와 조선 아나키스트 단체와 처음 조우하게 된다. 그는 공개 처형장에서 그들의 세계를 처음 마주하고, 이후 단원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단원들은 늘 깔끔한 차림에 사진 촬영을 즐기며, 거사 이후에는 와인과 맥주를 곁들인 파티를 여는 등 세련된 삶의 방식을 유지하지만, 그 이면에는 일제에 맞서는 치열한 투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상구는 선배들과 함께 아나키스트들이 자주 찾는 유흥공간 ‘가르시아 홀’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단원들은 무대 위 여왕이자 세르게이의 연인인 ‘가네꼬’의 매혹적인 공연에 심취한다. 하지만 세련되고 멋진 생활과는 다르게 세르게이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편에 의존하고 있었고, 어느 날 가르시아 홀 밖에서 중국인 건달들에게 폭행을 당해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간신히 단원들의 도움으로 살아난 그는 가네꼬의 집에서 피신하며 회복한다.
이후 단체의 리더 윤선생으로부터 새로운 임무가 하달된다. 세르게이와 상구는 러시아로 향해 러시아인을 암살하고 독립자금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중국 소녀 링링의 사진관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세르게이는 이근에게 가네꼬를 부탁하며 자신의 목걸이를 맡긴다.
러시아에서 임무를 완수한 두 사람. 그러나 금괴의 절반만 가지고 상구 혼자 돌아오면서 조직은 혼란에 빠진다. 세르게이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그는 결국 북경의 아편굴에서 발견된다. 의열단은 세르게이를 배신자로 간주하고 직접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근과 한명곤은 이 문제를 두고 갈등하며 조직은 내부 분열을 겪는다.
세르게이는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이근에게 권총을 건네지만, 그 순간 윤선생이 도착해 그를 처단하는 대신 마지막 임무를 맡긴다. 그것은 바로 일본 공관 암살이었다. 단원들의 엄호 속에서 세르게이는 홀로 무장을 하고 일본 공관으로 들어간다. 건물 안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그의 마지막 선택을 강렬하게 마무리 짓는다.
이 영화는 단순한 액션 서사에 그치지 않는다. 각 인물의 내면에는 ‘자유’와 ‘신념’, 그리고 ‘현실’ 사이의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상을 좇는 이들의 투쟁은 외부의 적뿐 아니라 내부의 배신, 그리고 개인적 욕망과도 싸워야 했다. ‘무정부주의’라는 이념은 단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죽음을 무릅쓴 실천이었다. 영화는 그러한 사상을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내며,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영화적 재현과 실제 역사 – 고증과 상상의 경계
영화 ‘아나키스트’는 철저하게 실화 기반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과 인물들의 배경, 사건의 설정은 실제 조선 아나키즘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을 묘사하기보다는 실제 사상의 흐름과 사건 구조를 바탕으로 ‘집합적 인물’과 ‘상징적 서사’를 창조해 낸 역사 재현 영화다.
먼저, 배경은 정확히 역사적이고 사실적이다. 1920년대 상하이는 실제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고, 의열단, 신민회, 아나키스트 연맹 등이 활동했던 공간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활동한 의열단과 아나키스트들 중에는 유자명, 박열, 신채호 등 실존 인물이 존재했다. 영화는 이들의 이념과 활동 방식, 당시의 정치적 지형을 반영하고 있다.
영화 속 아나키스트 조직이 벌이는 활동은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폭탄 투척, 암살, 은행 습격 등은 실제로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이 감행했던 투쟁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박열은 일본 천황 암살을 모의한 혐의로 투옥되었고, 실제 조선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무장투쟁을 주도하며 일본 내외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만큼 허구적 요소도 많다. 등장인물 대부분은 가상의 인물이며, 감정선이나 갈등 구조, 조직의 최후 등은 서사에 맞춰 구성되었다. 특히 인물들 간의 관계, 사랑, 배신, 희생 등은 상징적 장치로 쓰이며,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고증 측면에서 보면 의상, 건축, 상하이 거리의 재현, 무기와 전략의 묘사 등은 당시 시대 분위기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영화는 조계지의 특성과 혼종 문화, 상하이 특유의 모던함과 식민지 현실을 동시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배경의 리얼리티를 통해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아나키스트’는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균형을 지향한 작품이다. 실존 사건을 바탕으로 현대적 감성과 철학을 담아 재해석한 영화로, 단순한 역사 재현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상과 질문을 던진다. 독립운동은 단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이념과 사상을 끊임없이 질문한 이들이 바로 ‘아나키스트’였다.
영화 ‘아나키스트’는 단지 일본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그린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인 청년들이 꿈꾸었던 가장 급진적이고 순수한 사상—무정부주의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그린 작품이다. 실화에 기반하고 영화적 상상력으로 재해석된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생각하는 저항’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지금, 당신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