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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문, 열리지 않은 책임 / 공권력 / 침묵 / 상처

by hwangsong 2025. 9. 9.

영화 '두 개의 문'은 용산참사를 중심으로 공권력의 폭력성과 국가의 침묵, 그리고 그로 인해 지워져간 사람들의 기억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사건 기록을 넘어, 우리 사회가 공권력과 진실을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직시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두 개의 문’이라는 제목이 상징하듯, 진실과 거짓, 책임과 침묵의 경계에서 우리는 어떤 문을 열어야 할 것인가.

 

영화 두 개의 문 포스터 이미지
영화 두 개의 문 포스터

두 개의 문에 담긴 공권력의 실체

2009년 1월, 서울 용산구 한강로 재개발 지역. 철거민들은 하루아침에 쫓겨날 위기에 놓인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마지막 저항으로 그들이 택한 것은 한 평 남짓한 망루였다. 경찰은 이를 불법 점거로 규정하고, 특공대를 투입해 강제 진압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참사는 언론에 의해 '불법 농성의 결과'로 단순화되었고, 대부분의 국민은 그 보도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3년 뒤 공개된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영화는 경찰 내부 무전, 작전 지시, CCTV 영상, 통화 내역 등 공공기관에서 공개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재구성한다. 진실은 명확하다. 경찰 지휘부는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무리한 작전을 지시했고, 현장 특공대는 불이 날 가능성이 있음에도 진입을 감행했다. 불길은 순식간에 망루를 집어삼켰고, 탈출로도 마련되지 않은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 사건에서 '공권력'이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질서를 유지하는 기관이었을까, 아니면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폭력의 도구였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후자'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 폭력은 매우 체계적이며, 시스템 안에서 정당화된 형태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작전 당시 경찰청은 “모든 상황은 통제되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현장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고, 위험 상황은 무시되었으며, 무엇보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철거민은 협상의 대상이 아닌 제거의 대상이었다.

 

또한 영화는 ‘책임의 흐름’에도 주목한다. 사건 이후, 경찰 지휘부와 관련 공무원 누구도 실질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다. 오히려 생존자들은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망한 경찰의 명예는 국가적 예우를 받았지만, 철거민의 죽음은 '자업자득'으로 취급되었다. 이 비대칭은 공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의 단면을 드러낸다. 권력은 언제나 자기편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는 엄격하다. '두 개의 문'은 영화지만, 동시에 재판이자 기록이며 고발이다. 단 한 번도 조명되지 않았던 내부 자료들을 바탕으로, 관객은 진압 작전의 매 순간을 눈으로 목격한다. 폭력을 목격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지만,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공권력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누구를 희생시켰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더 나아가 영화는 경찰 개개인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조직이라는 이름 아래 익명화된 명령 체계 속에서 움직인다. 진짜 문제는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 인간을 배제한 판단 구조다. 망루 위의 철거민은 숫자로만 존재했고, 그 숫자는 작전 성공률이라는 통계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그 성공률은 경찰 조직의 승진과 평가로 이어졌다. 결국, 사람의 생명보다 체제의 안정이 우선된 것이다.

국가는 왜 침묵했는가?

공권력의 물리적 폭력만큼이나 영화가 집중하는 부분은 ‘국가의 침묵’이다. '두 개의 문'은 이 침묵이 얼마나 견고하고 조직적이며 위험한지를 조명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무전 기록, 보고서, 언론 보도는 하나같이 동일한 방향을 가리킨다. 책임 회피, 진실 은폐, 그리고 정의의 지연이다.

 

사건 직후 정부는 용산참사를 “불법 폭력 시위에 따른 화재 사고”로 규정했다. 이는 단순한 설명이 아닌, 정치적 판단이었다. 정부는 공권력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사건을 '범죄'로 프레임화했고, 철거민들을 ‘폭도’로 낙인찍었다. 이 정의는 재판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생존자는 중형을 선고받았고, 국가의 책임은 끝내 인정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다. 사건에 대한 독립적인 진상조사 요구는 묵살되었고, 언론은 정부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국민 다수는 그 내용을 그대로 믿었다. 시민사회 또한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심을 잃었다. 결국 피해자는 역사에서 지워졌고, 국가의 침묵은 구조화되었다.

왜 국가는 말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침묵은 권력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말하면 책임을 져야 하고, 기록하면 증거가 된다. 그래서 국가는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진실은 의도적으로 누락되고, 기록은 왜곡되며, 질문은 묵살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해자들은 다시 한 번 죽는다.

 

'두 개의 문'은 이런 침묵의 구조를 해체하려 한다. 특히, 감독이 택한 '기록 중심의 구성'은 말 대신 자료를 통해 침묵을 깨뜨리는 전략이다. 영화는 누구의 목소리도 덧붙이지 않고, 대신 그 당시 존재했던 기록들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는 관객에게 말한다. "이것이 당신이 보지 못한 진실이다." 또한 침묵은 단지 정부와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 침묵에 공범이었다. 영화는 '말하지 않는 자들의 책임'을 조명한다. 침묵은 무죄가 아니라 선택이며, 그 선택은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기억은 말할 때 시작된다. 우리는 너무 오래 침묵했고, 그 결과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기억되지 못한 사람들, 남겨진 상처

'두 개의 문'이 말하는 궁극적 메시지는 바로 '기억'이다. 단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책임자를 찾는 것을 넘어서, 이 영화는 ‘기억되지 못한 사람들’을 다시 불러온다. 그들은 망루 위에서 죽어간 사람들, 재판에서 죄인이 된 생존자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싸웠던 유가족들이다.

 

사망한 철거민 중에는 일용직 노동자, 생계형 가장, 이주민까지 다양한 삶의 궤적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도 망루 위에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곳은 최후의 선택이었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대화조차 보장받지 못했을 때 택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었고, 그 죽음조차 존엄하지 못했다. 언론은 그들을 ‘폭력 시위대’라 불렀고, 여론은 그들을 ‘사회질서를 해친 사람들’로 치부했다. 그들의 가족들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도 모자라,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영화는 이 잊힘의 구조에 정면으로 저항한다.

 

'두 개의 문'은 그들을 수치로 환원하지 않는다. 얼굴과 이름, 목소리와 사연을 다시 꺼낸다. 이는 다큐멘터리의 본질이자, 가장 강력한 복원이다. 한 사회가 누군가를 기억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기억은 인간성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억은 단지 과거의 슬픔을 되새김질하는 행위가 아니다. 기억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고, 제도적 변화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망루 위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요구했던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존엄, 대화의 권리, 그리고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기억되지 않은 사람은, 다시 희생자가 된다. 우리는 '두 개의 문'을 통해 이 순환을 끊어야 한다. 그들의 이름을 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더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와 의식을 바꿔야 한다. 진정한 기억은 슬픔이 아니라, 책임이다.

 

'두 개의 문'은 단지 2009년의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권력과 진실, 침묵과 책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치열한 질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잊힌 목소리를 기억하고,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 이제는 당신이 그 기억을 이어갈 차례다.